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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 질문을 계속 이동시키는일
하나의 질문을 오래 이동시키는 일
백해용 | Baek Haeyong
2026년 7월 29일
예다,2017년의 회화를 다시 꺼낸다. 오래전에 그린 그림을 복제하고 디지털 이미지로 옮긴다. 그 이미지는 가상의 의자가 되기도 하고, 다시 전시 공간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하나의 회화가 서로 다른 형태와 환경을 거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처음에는 단순히 형태를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업을 반복하면서 관심은 형태의 변화보다 남아 있는 생각으로 향했다. 같은 이미지를 다른 조건에서 바라볼 때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드러난다. 하나의 질문이 여러 매체를 거쳐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질문은 점차 기초적인 곳으로 돌아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서 왜 그리는가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서 왜 보여주려 하는가로 생각이 이어진다.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주제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엇을 표현할 것인지 정하고 그에 맞는 형태를 찾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업을 반복하는 과정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들고, 지우고,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쌓이면서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공통점이 나타났다. 주제는 그렇게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작업하지만, 관심은 자연스럽게 아직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확신보다 질문이 많아진다. 익숙한 재료와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발견한다.
때로는 오랫동안 유지해 온 형식이나 의미를 내려놓기도 한다. 반복된 작업에는 익숙함이 생기고, 익숙함은 어느 순간 생각의 범위를 제한한다.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무엇을 남길 것인지 판단하게 된다.
비운다는 것은 단순히 적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여러 가능성을 지나온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다. 무엇인가를 더하는 일만큼 덜어내는 일에도 시간과 판단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과 AI를 이용해 기존 작업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머릿속의 생각을 이미지로 구현하고, 서로 다른 형태와 공간에 적용해 본다. 이전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던 시도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지를 생성한 뒤에는 시간을 두고 다시 바라본다. 처음에는 흥미로웠던 이미지도 며칠이 지나면 관심에서 멀어지고, 어떤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남은 것이 실체로 이어진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미지를 생산하는 일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그만큼 선택과 판단의 중요성도 커진다.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무엇을 실제 작업으로 옮길 것인지, 무엇을 남기고 어떤 것을 덜어낼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작업을 기록하는 방식도 변화하고 있다. SNS와 디지털 아카이브는 하나의 생각이 어떤 형태로 이동해 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과거의 기록을 다시 꺼내 현재의 작업과 연결하면서 시간에 따라 달라진 생각을 확인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형태에 대한 관심은 점차 형태가 생겨나는 이전의 상태로 향한다.
하나의 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면 같은 선을 만들 수 있을까.
인간은 반복과 복제를 통해 동일한 결과를 얻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미세한 차이가 남는다. 손의 움직임, 재료의 상태, 주변 환경, 그리고 그 사이에 지나간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오차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차를 시간의 흔적으로 바라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같은 붓질을 반복하더라도 오늘의 선과 내일의 선은 서로 다른 시간을 포함한다.
선은 점이 아니라 지나간 속도이며, 그 움직임이 멈춘 자리에 남은 흔적이다.
의도를 줄이고 손의 움직임에 따라 선을 긋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가 나타난다. 여러 선이 겹치고 흩어지며 공간을 만들고, 그 사이에는 여백이 남는다. 보는 사람은 그 안에서 각자의 이미지와 감정을 발견한다.
이때 관심은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는가로 이동한다.
의미는 언제부터 의미가 되었을까. 언어가 생겨나기 이전에도 의미는 존재했을까.
인간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돌과 집, 나와 너를 구별하면서 각각의 존재를 인식한다. 언어는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경계를 만드는 역할도 한다.
그렇다면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상태는 무엇일까.
지금 이 글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든 가능성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상태로 바라볼 수도 있다. 형태와 이름이 생겨나기 이전, 서로 다른 존재로 나뉘기 이전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외로움으로 이어진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가 된다.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면서 혼자라는 감각도 생겨났을 것이다. 외로움은 누군가의 부재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자각은 다시 다른 존재와 연결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신은 외로움을 알까.
완전한 존재에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있을지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는 신이 인간의 외로움과 고통을 이해한다고 믿을 때, 완전함이라는 개념에 공감과 따뜻함이 더해진다.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관계를 맺고, 때로는 충돌하며, 다시 연결을 시도한다. 외로움과 화합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다.
나는 ‘Harmony’ 화합(和合) 라는 주제를 사용해 왔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의 화면에서 관계를 이루는 현상에 관심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합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화합이라는 말에는 평화와 사랑, 이해와 배려 같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러나 실제로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놓인 상태에는 충돌과 긴장, 밀어냄과 침범도 존재한다.
화면 위의 선과 색은 서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겹치거나 분리된다. 어느 하나가 중심을 차지하기도 하고, 중심을 피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각자의 영역을 유지하면서도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이러한 관계를 관찰해 왔다.화합은 모든 것이 하나로 섞여 안정된 상태만을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존재가 각자의 성질을 유지하면서 같은 공간에 머무는 과정에도 화합의 가능성이 있다. 그 안에는 균형과 불균형, 질서와 충돌이 함께 존재한다. 어디까지를 화합으로 볼것인가. 또 그 주변은 무엇이 있는가.
크게 펼진다면 , Harmony에서 시작된 질문은 여백으로, 여백에서 무와 공으로, 다시 언어와 의미, 외로움과 연결의 문제로 이어졌다.
서로 다른 개념처럼 보이지만 오랫동안 같은 현상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결과이기도 하다. 하나의 단어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그 단어가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함께 드러난다.
그래서 최근에는 새로운 제목을 찾는 일보다 지금까지 사용해 온 단어와 작업을 다시 살펴보는 데 시간을 쓰고 있다. 작업이 쌓이고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말이 끝까지 남을지 지켜보려 한다.
이러한 질문은 작업실 밖의 생활과도 연결된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의 습관과 행동,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몸과 생활을 돌보는 방식은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 반복된 생활은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은 결국 작업에도 나타난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도 주제의 삶을 이루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 역시 그 일부다. 생활이 안정되어야 작업을 오래 지속할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과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서로 다른 노동이지만 결국 하나의 삶 안에서 이어진다.
작업의 땀은 작품을 만들고, 생계의 땀은 생활을 지탱한다. 어느 쪽에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생계는 단단하게, 마음은 가볍게, 작업은 오래.
이 문장을 생각하면서 생활과 작업의 균형을 다시 살펴본다.
무리하게 작업하다 보면 피로와 고통을 겪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도 매 순간 즐거울 수는 없다. 때로는 방향을 잃고, 익숙했던 작업이 낯설어지며,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시간에도 생활은 계속된다. 몸과 정신을 돌보고, 필요한 일을 하고, 쉬어야 할 때 쉬면서 다시 작업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간다.
건강은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지칠 때에는 이전과 다른 속도로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고통을 겪는다고 반드시 깊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을 줄이고 삶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작업을 오래 지속할 수 있게 한다.
나는 행복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어떤 결과를 얻거나 목표에 도달했을 때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쁨은 일상의 여러 순간에 이미 있지 않았나.
작업을 마치고 돌아보는 시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경험이 그렇다.
행복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작품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어디까지 왔는지, 앞으로 어디에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하나의 질문을 붙잡고 있어도 분명한 답을 얻지 못할 수 있다.
다만 같은 질문을 바라보는 동안 나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사소해지기도 하고, 지나쳤던 것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익숙한 작업을 다시 바라보면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생겨난 차이를 발견한다.
2017년의 회화를 다시 꺼낸 일도 그러한 변화의 일부다.
하나의 그림은 여러 형태로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이 생겨났다.
앞으로도 작업의 변화 속에서 무엇이 끝까지 남는지 지켜보고 싶다.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작품의 형태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질문을 오래 이동시키는 동안 사람도 함께 변한다.
나는 오늘도 그 질문을 따라 작업하고 있다.
백해용 2026 10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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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 생각정리 일부
작가노트
2017년의 회화를 다시 꺼낸다. 복제하고, 디지털 목업으로 옮기고, 가상의 의자를 만들고, 다시 전시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나는 새로운 작품을 계속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각을 다른 형태로 이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동의 목적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작품이 회화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오브제로, 다시 공간으로 옮겨갈 때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질문이 조금씩 드러난다. 생각을 이동시키는 이유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각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나는 하나의 질문을 계속 다른 형태로 이동시킨다. 그 질문이 어디에 도착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나 자신과 조금씩 마주하게 된다.
갈수록 질문은 기초적인 곳으로 돌아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왜 그리는가를 묻게 되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보다 왜 보여주려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주제를 먼저 만들고 작업을 그 안에 넣으려 하지 않는다. 주제는 오랜 시간 같은 질문을 바라보고, 만들고, 지우고,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에 오래 질문하기 위해 작업한다.
모른다는 것은 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다. 알고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크게 보이는 상태에 가깝다. 기술과 재료와 경험은 사용하지만, 그것을 정답처럼 내세우지는 않는다. 작업은 답을 보여주는 행위라기보다 아직 모르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붙잡는 동안 사람은 변한다. 처음에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그다음에는 의미를 만들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의미를 만드는 일조차 내려놓게 된다. 그 이후에는 그저 오래 바라보게 된다.
의미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의미를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화면 위에 의미를 억지로 붙이지 않겠다는 태도다. 내 것이라는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정답과 목적지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지금까지 반복해 온 형식도 내려놓는다.
그러나 버림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적게 만들고 적게 소유한다고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형식과 자의식은 내려놓을 수 있지만 질문과 책임까지 버린다면 작업도 사라진다.
결국 귀해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것을 지나온 뒤에도 빈자리와 질문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의식주는 안정시키되 작업 앞에서는 가난한 상태로 남고 싶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작품을 소유물처럼 움켜쥐지 않으며,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업의 가난함이다. 비어 있기 때문에 다시 보고, 다시 물을 수 있다.
미래에는 이미지를 만들고 정보를 모으며 의미를 붙이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쉬워질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이 자동으로 만들어질수록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기지 않을 것인가가 중요해질 수 있다.
작가에게 필요한 능력도 달라질 것이다. 많은 이미지를 생산하는 능력보다 불필요한 것을 알아보고 버리는 능력, 가장 기초적인 질문 앞에 다시 서는 능력, 아직 모른다는 상태를 견디는 능력이 더 귀해질 것이다.
AI로 이미지를 만드는 일도 그 연장에 있다. AI 이미지는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생각을 시험하는 스케치에 가깝다. 질문을 이미지로 옮겨 보고, 다시 바라보고, 며칠 뒤에도 남아 있는지 확인한다. 시간이 지나도 나를 멈춰 세우는 이미지만 실제 회화와 오브제, 전시로 이어간다.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질문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다. 전시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다. 질문을 공간 속에서 다시 바라보고 다른 사람과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질문한다.
이미지로 구현한다.
다시 바라본다.
불필요한 것은 버린다.
끝까지 남은 것을 실제 작업으로 옮긴다.
그리고 다시 질문한다.
이 순환에는 끝이 없다.
2017년의 회화도 끝난 작품이 아니었다. 다시 꺼내고, 복제하고, 디지털 이미지로 옮기고, 가상의 의자로 확장하고, 전시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림도, AI도, 오브제도, 전시도 질문이 지나가는 하나의 매체가 되었다.
SNS 역시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이동 경로 중 하나였다. 작품을 자랑하기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 어디까지 이동했는지 기록하기 위해 남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오늘 무엇을 올렸는가가 아니라, 오늘 나의 질문이 어디까지 이동했는가이다.
나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의 질문을 오래 이동시키는 사람인가.
그 질문은 점차 언어와 의미의 시작을 향해 내려간다.
무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일까. 아니면 모든 것이 생겨날 수 있는 상태일까. 인간은 같은 것을 반복하고 복제하려 하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세한 차이가 남고 우리는 그것을 오차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오차가 실수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라면, 오차는 실패가 아니라 시간의 질량이 된다.
같은 붓질을 해도 오늘의 선과 내일의 선은 다르다. 손의 움직임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선은 고정된 점이 아니라 지나간 속도이며, 그 뒤에 남은 멈춤이다.
완전한 곳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어는 이름을 붙이고, 구분하고, 경계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면 이름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무가 아니라 아직 나뉘지 않은 상태에 가까울 수 있다.
나는 무의미를 그리려는 것이 아니다. 의미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를 바라보려 한다.
의도를 줄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붓을 들면 화면에 형상이 나타나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형상이나 감정이 처음부터 목표였던 것은 아니다. 작업의 과정이 지나간 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나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는다.
의미는 언제부터 의미가 되었는가.
언어 이전에도 의미는 존재했는가.
인간이 이름을 붙이는 순간 돌은 돌이 되고, 집은 집이 되며, 나와 너는 서로 다른 존재가 된다. 구분이 생기면서 의미가 생기고, 의미와 함께 외로움도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나’라는 경계가 생겼기 때문에 혼자라는 감각도 생겨났을 것이다.
외로움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분리되었다는 자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자각은 다시 연결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된다.
신은 외로움을 알까.
완전한 존재라면 외로움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이 인간의 외로움과 고통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완전함 속에 공감과 체온이 생긴다. “신은 외로움을 알지.”라는 문장은 설명보다 따뜻하다.
어쩌면 의미는 외로움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하나였던 상태에서 나와 네가 나뉘는 순간 의미와 언어와 외로움이 함께 생겨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외로움이 있기 때문에 연결을 찾고, 외로움이 있기 때문에 화합을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Harmony’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화합은 너무 익숙하고 따뜻한 말이 되어버렸다. 평화, 사랑, 이해, 배려 같은 이미지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실제 현상을 바라보기 전에 단어가 먼저 결론을 내려버린다.
내가 화면에서 바라보는 화합은 따뜻한 이상만은 아니다. 서로 밀려나고 충돌하며,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면서도 완전히 섞이지 않는 것. 중심을 피하며 간신히 같은 화면에 남아 있는 것.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있을 때 생기는 압력도 화합일 수 있다.
그러므로 Harmony는 작품의 답이 아니라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단어가 된다.
하모니에서 화합으로, 화합에서 여백으로, 여백에서 무와 공으로, 무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의미로, 의미에서 외로움으로 질문이 이동한다. 이것은 단어를 바꾸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이 점점 근원으로 내려가는 과정이다.
새로운 제목을 서둘러 붙이지 않는다. 좋은 제목은 찾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작업한 뒤 끝까지 남는 것이다.
이 질문은 결국 작업에서 삶으로 이동한다.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은 서로 다르다. 첫 번째는 작품을 목표로 하지만 두 번째는 삶을 목표로 한다. 삶이 바뀌면 작업은 그 삶을 따라온다.
붓을 잡지 않는 순간의 태도가 결국 붓을 잡은 순간의 선을 결정한다. 평소의 행실과 습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몸과 생활을 돌보는 방식이 화면 밖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젠가 선과 색과 멈춤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좋은 작품을 쫓기보다 좋은 작품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삶을 만들고 싶다. 버릴 것은 버리고, 해야 할 일은 묵묵히 한다. 그 삶이 오래 이어질수록 작업도 조금씩 깊어질 것이다.
생계는 작업과 반대편에 있지 않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작업을 오래 지속하기 위한 조건이다. 돈이 생기면 감사하고, 삶이 안정되면 감사하며, 그 안정 속에서 계속 작업할 수 있다면 더욱 감사하다.
생계는 단단하게, 마음은 가볍게, 작업은 오래.
돈을 버는 일은 땀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삶을 지탱하는 기쁨이 될 수 있다. 작업의 땀은 작품을 만들고 생계의 땀은 삶을 만든다. 두 땀 모두 감사할 수 있다.
예술의 여정이 어둡고 지칠지라도 스스로 길을 닦으며 들어간 곳이라면 쉽게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고통은 막다른 길에서 생긴 고통이 아니라 길이 생겨나는 과정의 고통이다.
고통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고통을 만들기 위해 고통을 반복하는 것은 길이 없는 악순환이다. 건강을 해치면서 작업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좋은 작업이 나올 수 있는 삶을 위해 몸과 정신을 돌보고, 멈출 것은 멈추며,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이 매일 즐겁다는 뜻은 아니다. 슬프고 지친 날에도 방향을 완전히 잃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고통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감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견디는 삶이다.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에 서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같은 질문을 버리지 않았는가이다.
기쁨은 목적지에서 한꺼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조금씩 생겨날지도 모른다. 답을 얻었다는 기쁨도, 인정받았다는 기쁨도 아니다. 오늘도 조금 더 깊이 바라보았다는 작은 기쁨이다.
주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드러난다.
기쁨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어가는 과정에서 조용히 드러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행복을 쫓기보다 행복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작품을 억지로 만들기보다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목적지는 알 수 없다. 진리에 도달한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을 오래 이동시키는 동안 사람은 변한다. 어쩌면 작가에게 가장 큰 도달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017년의 회화를 다시 꺼낸다.
하나의 생각을 다른 형태로 이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
끝까지 남은 질문을 다시 바라본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에 오래 질문하기 위해 작업한다. -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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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행실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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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내 그림…내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할말이 없고 아무도 없다. 갈수록 대단할거 없는 기초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주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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